한국 음악
한국음악은 한국 전쟁 이전의 왕조에서 관촬하여 계승하도록 장려한 것과 백성들의 자발적인 농악을 포함해 전래와 전통음악, 즉 국악을 말합니다. 한국 음악은 인문학인 음악사학의 연구대상입니다.
고구려
고구려의 국악사는 세단계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제 1기는 외래 음악이 들어오기 이전의 시기이며, 기문고도 이때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때의 음악은 거문고와 같은 향토 악기로 대표됩니다. 제 2기에는 고구려가 중국의 후위와 교류를 하기 시작하면서 4세기 부터 6세기 중엽까지로 구분합니다. 제 3기는 6세기 후반부터 고구려가 멸망할때까지로 구분합니다. 고구려의 음악은 매우 융성하여, 수나라의 9부기 등에도 포함 되었고 서역음악인 구자악이 들어와 고구려에 많은 악기가 쓰여진 시기입니다. 많은 악기를 사용하여서 그때의 백제와 신라의 음악에 비해 매우 발전 하였습니다.
백제
백제음악은 고구려에서 보이는 벽화 같은 것이 없어 기록이 적습니다. 백제음악은 고구려의 거문고를 차용한 것이 주목되고 고구려와 같고 신라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음악은 5~6세기에 중국 남송과 북귀에 소개 되었고 또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 악사들이 교대로 일본에 건너가서 음악을 전습 시켰습니다. 백제 사람 미마지는 중국 남부 오나라에서 기악을 배워 일본에 전했습니다.
신라
통일 이전의 신라의 음악은 가야금이 대표 합니다. 가야금은 진흥왕때에 가야의 우륵이 신라에 전했다고 합니다. 이때의 음악으로는 삼국사기에 이름만 전하는 가야금 12곡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신라음악은 가야금과 춤과 노래로 편성 되었다고 하고 관악기와 타악기가 보이지 않고 오직 현악기 한가지에 맞추어서 춤추고 노래하는데, 이것은 고구려 및 백제음악과는 다르게 단순한 편성으로 되어있습니다.
통일 신라
통일 이후의 신라에서는 향악의 발전이 두드려집니다. 특히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의 3현과 대금, 중금, 소금의 3죽으로 대표됩니다. 또한 당나라 음악이 유입하면서 새로 수입된 음악 양식이 생기고 당음악에서 쓰던 다양한 조들이 쓰이게 되었습니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와 융성해지자 불교 의식음악이 많이 불리고 또 당에서 새로운 불교 의식 음악이 들어오면서 신라풍, 당풍, 당이전의 고품 이렇게 3가지 불교 의식 음악이 불렸습니다. 통일신라의 재래음악은 가야금, 춤, 노래로 편성되어 악기는 가야금만 쓰이던 것이 관악기를 도입하면서 신라의 음악은 가야금, 거문고, 비파, 대금, 중금, 소금, 즉 삼현삼죽이 쓰이게 되었습니다.신라에서는 음악을 관장하는 공식적인 국가 기관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발해
발해는 민간 음악과 궁중 음악이 발전함에 따라 태상시를 설치하고 발해의 음악, 무영, 제사에 관한 것은 의부에서 맡아보는 업무 엿으나 발해 음악과 무용이 발전하는 수요에 따라 새로 독립적인 기구인 태상시를 설치하고 예악과 제사를 관리하였습니다.
고려 시대
고려를 창건한 태조는 신라의 고풍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국가 태평을 비는 팔관회와 불교의식인 연등회가 일례입니다. 이두 가지 의식은 향악과 당악뿐만 아니라 오락 위주의 민간에서 행해지던 산악까지도 포괄한 대규모 의식이고 이또한 신라의 것에서 왔습니다. 예종 때에는 송나라부터 아악이 도입되면서 신라 때 들어온 당의 음악을 밀어 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향악은 고려에서도 계승되었고 새로 많은 향악곡이 생겨 그 일부는 조선때까지 전승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세종, 세조때에 아악이 박연이라는 음악가에 의해 정리 되고,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악기를 직접 만들어 썻으며, 정보간, 오음악보등에 의한 기보법이 창안했으며, 아악보가 편찬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정대어브 보태평등을 직접 작고하였습니다. 인조 21년에는 사직과 문묘제례악이 정해지고, 인조 25년 아악을 다시 쓰게 되었으며, 광해군, 효종, 영조 때, 악학궤범을 복간하고 악기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종료제례악과 삼현 육각에 의한 음악이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가곡, 가사, 시조 드의 성악곡이 널리 불렸고 특히 영조 이후 일반 백성들에게서 판소리, 산조 등이 성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숙종 때의 판소리 체계화는 큰 발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종은 악리를 연구하였고 박연에게 율관을 제작시켰고, 유량업보를 발명하였고, 성종 때 성현은 악학궤범 같은 독립한 악서를 찬술하여 음악의 학문면에서 큰 발전을 보였습니다. 한판 음악 예술면에서는 유교의 예악사상의 영향을 받아 아악이 주용시 되어 아악서가 독립하였고 당악과 향악의 남녀상열지사도 잘못 된 것을 고쳤습니다. 특히 그 때 향악은 유식한 한문의 가사를 많이 써서 그런 가사에 붙여진 음악도 점차 당악같이 담담해져 조선 전기의 향악은 조선의 백자에 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임진 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한국 문화는 큰 시련을 당하여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조선의 음악도 이때를 계기로 변화하였습니다. 조선 전기에 힘써 갖추어 놓았던 아악은 난리통에 흩어졋고 후에 문물이 바로잡히면서 아악을 재건 하였으나, 규모는 줄어들도 말았습니다. 조선 전기 음악에 많이 전하던 고려조의 향악과 송의 사악은 대부분 상실되거나 변질 되었으나 명맥을 유지한 악곡은 많은 변주곡을 낳아서 조선 후기의 향악고의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영조 이후에는 서민문화의 대두에 따라 판소리, 산조, 잡가와 같은 민속음악이 생겨 민간에 유포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음악은 민간 음악의 대두와 해학적인 점이 큰 특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