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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낭만주의 작곡가 -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

by humon 2024. 4. 18.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1810년 6월 8일 ~ 1856년 6월 30일)은 독일의 작곡가,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평론가입니다. 

 

슈만은 피아니스트가 되기 전까지는 법에 대한 공부를 했고 프리드리히 브크를 사사하여 피아니스트로 훈련을 받던 주으 손 부상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가 끝나게 되면서 음악적 에너지를 작곡에 쏟아부었습니다. 슈만은 1840년까지 피아노 곡만 썻는데, 이후에는 관현악 작품들과 가곡을 썼습니다. 평생동안 교향곡 네곡, 오페라 한편을 비롯해 많은 작품을 썼고 이것들은 문학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아 곡으로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슈만은 7세 이전에 곡을 쓴적이 있긴하지만 출판업자이자 소설가인 아버지에게 음악보다도 문학적 가정 교육을 받았습니다. 7세의 나이에 슈만은 요한 고트프리트 쿤츠슈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음악에 빠져 쿤츠슈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츠비카우에서 학교를 다니며 바이런과 그리스 비극가들뿐만 아니라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인 실러와 괴테, 장 파울의 작품을 읽었고 슈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슈만은 카를스바트에서 열린 이그나츠 모셸레스의 공연에서 처음으로 음악가가 되고자 하는 장래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베토벤, 슈베르트, 멘델스존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슈만은 어머니의 뜻과 권유로 라이프치히 대학 법과에 진학하게 됩니다. 법률 공부를 하려던 슈만이었지만 결석하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고 슈만은 어머니에게 냉철한 법학을 좋아할 수 없다고 적어 편지를 보내고 피아노를 입수하여 동료 학생 중 현악기 연주자를 발견해 실내악 연주에 열중하게 됩니다. 슈만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전학 하고자 후견인을 설득 하여 승낙받게 됩니다. 당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는 유명한 법학 교수가 있어 그들의 강의를 듣고 싶다는 것이 슈만의 전학 이유였지만 실제로 슈만은 새벽부터 피아노를 연주하는 듯 이미 법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슈만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교수님의 합창단에서 직접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연주하면서 교슈님에게 인정받았고 슈만은 이것을 계긱로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에 할애하기 시작했습니다. 피아니스트로서 슈만의 명성은 바덴 대공비인 스테파니의 초청을 받아 만하임에서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높아져만 갔습니다. 이때 슈만의 작품번보 1번 아베크 변주곡이 완성돼었습니다. 이후 슈만은 자신이 하이델베르크의 유명인사가 되었다며 자랑하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습니다.

 

아들을 법조인으로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의 마음은 여전했지만 당시 유명 피아노 교사인 비크의 제자로 6개월간 채용 되고 반년 후 비크는 슈만의 재능과 소질은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억지로 법조인의 길을 걷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하여 어머니는 슈만이 음악가 될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슈만은 비크의 집에 거주하면서 레쓴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까다롭고 엄격한 비크에 대해 점점 불만을 가지게 된 슈만은 훔멜에게 편지를 써 불만을 털어놓고 레슨을 받고 싶다고 부탁했고 이 사실을 비크에게도 말해 호된 질책을 받게 됩니다. 1831년 슈만은 테크닉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오른손이 망가졌다고 자서전에 적었고 부상을 입으면 작곡에 전념하기 시작합니다.

 

슈만은 1832년 라이프치히의 일반음악신문에 프레데리크 쇼팽을 소개하는 글을 투고했다가, 카를 체르니 등 독일의 속물적인 음악비평계의 수준에 불만을 품게 되면서 친구들과 새로운 잡지를 발행하는 것에 논의 하고 음악신보를 창간했습니다. 슈만은 음악신보에서 새로운 시작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저속한 블레셋인과 싸우는 다비드 동맹이라는 가상 동맹을 만들었습니다. 슈만은 1838년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도시인 빈으로 가게 되었는데 빈의 출판자들은 적의를 품고 슈만을 맞았습니다. 당시 빈은 반동주의적 정치체제 하에 있었고 각지의 자유주의 운동과 혁명의 파급을 우려해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빈에 머무는 동안 슈만은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을 방문하고 교향곡 1번을 쓰게 됩니다. 이 교향곡은 1839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 멘델스존의 지휘로 초연돼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1839년 슈만은 "성악곡은 기악고보다 수준이 낮아 위대한 예술로 인정하기 어렵다"라는 평을 받고 작품 23번의 4개의 녹턴까지 거의 피아노곡만 작고했습니다. 1840년에는 가곡집을 작곡하는가 하면 중창곡까지 작곡 하게 됩니다. 평생 슈만이 남긴 가곡의 대부분이 만들어져 가곡의 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841년 교향곡 1번이 완성되었고 이 교향곡은 슈만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곡의 송공은 슈만의 창작활동에서 피아노곡과 가곡에서 교향곡 작가로의 탈피라는 획리적인 계기가 도비니다. 이후에도 슈만은 서곡, 스케르초와 피날레,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라단조 교향곡 등 오케스트라 적품에 몰두했습니다. 이듬해인 1842년 슈만은 실내악곡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3곡의 현악 4중주곡, 피아노 5중주고, 피아노 4중주곡 등을 작곡하였습니다. 멘델스존의 음악원에서 강사로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어 활약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1833년 부터 간헐적으로 정신병적 증상이 심해지는데 1840년에 이미 환청 등 환각 증상과 망상이 나타났고 증상이 더욱 심해져 라인강에 투신하게 되면서 정신병동에 자발적으로 입원하게 됩니다. 정신병적인 우울증으로 진단 받은 그는 회복하지 못했고 2년 후 46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주요 작품

 

교향곡 1번 : 슈만이 작곡한 최초의 완성된 교향곡으로 여러번 교향곡을 시도하지만 작곡하지 못하다가 연인의 가장 큰 소원이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하는것이라는 권유를 듣고 만든 곡으로 펠리스 멘델스존의 지휘 아래 열렸으며 교향곡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봄의 교향곡으로도 불립니다.

 

나비 : 슈만이 작곡한 피아노 모음곡입니다 가면무도회를 표한하기 위한 장 파울의 소설 사춘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곡은 항상 결혼식이나 이와 유사한 축하 행사가 끝날 때 연주되는 전통적인 할아버지의 춤 주제를 인용하면서 시작됩니다.